2019. 6 전국 특별집회 #2

현재의 움직임

현재의 그리스도의 움직임

2019. 6 전국 특별집회 #2

성남교회 0 4501
전체주제: 회복된 교회 안에서 이기는 생명을 삶으로 신성한 경륜을 완성하고 새 예루살렘이 됨

메시지 2.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회복된 교회에 의해 성취됨

성경: 엡 1:9, 3:11, 딤후 1:9, 롬 8:28, 계 3:7-8

서두의 말씀

전체 주제의 구조를 보면, 새 예루살렘이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새 예루살렘은 단체적인 인격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이루는 인격이다. 새 예루살렘은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아내이다. 새 예루살렘이 완전히 건축된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될 것이다.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러한 단체적인 인격으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영원 미래에 있게 될 작은 창문이다. 이제 영원 과거로 눈을 돌려보자.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에베소서가 필요하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서신을 쓸 때 죄수의 신분이었다. 그는 물질적으로 말하자면 아주 제한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영 안에서 그는 제한받지 않았다. 이것은 계시록 21장의 영 안에서 이끌려져서 새 예루살렘의 이상을 본 사도 요한과 같다. 바울은 그의 영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었다. 그는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부터 이것을 썼다. 그리고 영원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어떤 것도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오직 하나님만 거룩하시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갖는 문제이다. 그분의 거룩한 본성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되도록 미리 선택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흠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1장 5절에서 우리를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셨다고 말한다. 미리 정한다는 것은 미리 그 결과를 결정해 놓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아들의 기능은 아버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영광 안에 계신 아버지를 표현해 내셨다.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아들의 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셨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아들의 생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숙한 아들의 위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4, 5절에서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것과 아들을 본다. 이것이 영원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에 있는 계시록에 있는 영원 미래를 볼 것이다.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아내는 신부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신성한 아들의 자격의 총체이다.

우리는 영원 과거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거룩하게 되도록 이미 선택되었고 정해졌다.
마지막에 가서 새 예루살렘이 있다.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아내인 신부이다. 하나님과 본성에서 동일하다. 신성한 생명으로 충만하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우리는 다 부활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지금 자매님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오늘날 형제들인 우리는 그날에 다 아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과 끝을 보았다.
계시록 4장에 보면,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창조되었다. 문맥에 따라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바로 결혼하는 것이다. 그분의 아들을 위하여 배필을 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새 예루살렘을 갖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을 바울이 말한 후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에베소서 1장에서 그분의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분을 표현하는 한 무리의 사람을 필요하셨다. 또한 그분과 결혼할 단체적인 인격을 원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밀이었다.
욥 조차도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몰랐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몰랐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어떤 논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욥이 10장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는 계시되었다. 그분의 아내가 될 교회를 얻으실 목적으로 그분은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그분의 뜻에 대해서 또 다른 표현을 한다.
바울은 그분 자신의 뜻의 의결을 말한다. 의결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수행하시는 방법을 말한다. 모든 일을 자신의 뜻의 의결대로 일하시는 분의 목적을 말한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 1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하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9절과 11절은 이 영원한 목적이 교회를 얻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간략한 개요이다.
하나님이 정한 어떤 의도를 말하는 것이다. 영원 과거와 영원 미래는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때문에 시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에베소서 1장과 계시록 21, 22장의 빛에 근거해서 창세기 1장을 새롭게 읽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듭시다. 그리고 그들이 온갖 것을 통치하게 합시다.”

골로새서 1장 15절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에 따라 창조되었다. 우리는 단체적으로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온 땅을 채우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창세기 1장 26절은 통치권을 말한다. 이것은 권위의 문제이다. 28절에 땅을 정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권위로 하나님을 대표하여 대적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왕국을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시간과 공간에 들어와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계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영원하다. 영원 안에서 이것은 계획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완결도 영원하다. 그러나 이 영원한 목적이 이 땅에서 시간 안에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간은 두 영원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다.

시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믿는 이들과 교통할 수도 있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왜 여러분이 살아 있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왜 당신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가? 당신이 이 땅에 잠시 동안 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 땅에서 당신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가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것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말하는 복음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시간에서 당신의 삶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어떻게 사는가?” 이것이 오는 시대 안에서 천년 동안 우리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로마 천주교에 의해서 결코 성취될 수 없다. 하나님은 로마천주교를 가질 뜻이 없으시다. 대환란 동안에 하나님은 적그리스도를 사용하여 카톨릭을 파괴할 것이다.

마틴 루터로부터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어떤 진리들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자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가 나타났다. 물론 거기에 진실한 믿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18장에 언급된 그 교회를 회복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계시록에 언급된 지방 교회들을 회복할 필요가 있으시다. 주님은 19세기 초에 이 일을 하셨다.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그러나 회복된 교회가 하락하여 라오디게아가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중국 땅에서 워치만 니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가지셨다. 97년 전에 회복된 교회가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것을 한국 땅에도 가져오셨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일어났다. 여러분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회복된 교회 안에서 무엇을 성취하기 원하시는지를 우리는 보아야 한다.

그분은 회복된 교회를 통하여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성취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그분이 필요로 하시는 협력을 제공해 드리겠는가?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살기를 배우겠는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기는 이들이다. 우리가 회복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실패한다면 주님은 또 다른 50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시작을 갖기 위해서 또 다른 무리에게 가실 수도 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교회 생활 안에 들어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몰랐었다.
회복된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그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개요를 읽어나가면서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회복된 교회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자.

Ⅰ. 오직 회복된 교회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 엡 1:9, 3:11, 딤후 1:9, 롬 8:28, 계 3:7-8.

우리는 이 문장에 근거해서 서 있다.

A. 영원한 목적, 곧 시대들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영원 과거에 정하신 영원한 계획이다 ― 엡 3:11

1.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영원한 목적의 개시이자 기원이자 영역이시다 ― 엡 1:9.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자신과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목적이 그분이 정한 의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를 이미 결정하셨다.

물론 그분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도록 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신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와 관련하여 뜻을 갖고 계신다. 물론 그분은 여러분의 뜻, 의지를 존중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의도하신 것을 이루시려고 이미 결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막 대학을 졸업하고, 아주 장밋빛 장래가 있을 수 있다. 그분은 많이 말씀하시지 않는다. 다만 ‘전시간 훈련’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여러분은 ‘안돼요’라고 할 것이다. 나는 지금 결혼을 하고 싶은데 2년이나 기다릴 수 없다고 한다. 자매는 다시 기도한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분은 ‘전시간훈련’이라고 하신다. 선택을 할 때까지 계속 말씀하실 것이다.  “좋습니다. 가겠습니다. 아멘입니다.” 할 때까지이다.

2.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지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 교회를 통해 그분 자신을 표현하실 수 있다 ― 엡 1:5, 9, 11, 22-23.

하나님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의 삶의 모든 방면들을 안배하실 것이다. 여러분의 인간 생활의 모든 단계를 안배하실 것이다. 최상의 결혼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제와 자매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결혼이다. 그러나 결정은 여러분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계속 이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여러분은 강한 의지로 계속 거부한다면, “좋다.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하실 수도 있다. 내가 내버려두겠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할 다른 사람을 내가 일으키겠다 라고 하실 것이다.

B. 이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정확히 그분과 똑같이 될 한 무리의 사람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유일한 주제이다 ― 요 1:12-13, 요일 3:2.

그분의 신격에 있어서 그분과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생명 안에서, 본성 안에서 정확히 똑같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됨을 아들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제이다. 여러분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다.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오직 한 가지 선택권을 주신다. 여러분이 아들로서 거룩하게 될 것인가 아닌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정확히 똑같은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두 개의 다른 시간대가 있다. A 선택권이 있고, B 선택권이 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되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남은 일생을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보낼 수는 없다. 그들은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애너하임 교회의 어떤 가정을 잘 알고 있다. 남편은 아주 잘생겼고, 아내도 예쁘다. 정말 예쁜 딸인데 고등학교에 있는 모든 남학생들이 그 여학생을 사귀기 원하였다.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세상이 길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불을 통과하여 구원받을 것인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을 가겠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구원받았다. 영원 과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혼인잔치에 들어갈 것이다. 천년 동안 주님의 기쁨에 참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영역이다.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이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여러분은 결국 동의하게 될 것이다.

1. 생명과 본성과 형상과 외양과 광채와 영광과 외적인 표현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똑같을 것이다 ― 계 4:2-3, 21:10-11, 18.

내가 한 단어씩 다시 말하겠다. 우리는 생명 안에서 하나님과 똑같을 것이다. 젊은 청년들로서 아내를 구하는 청년들이 있다면, 여러분이 이러한 집회에 와서 물론 주님을 추구하면서 여전히 눈을 열어서 그녀가 여기에 왔는가 찾고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찾고자 하는 목록이 있다면 나는 이러한 리스트를 추천한다.

생명, 본성 형상, 외양, 광채, 영광, 외적인 표현이다.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나는 혼자서 이렇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항목에서 나와 부합하는 자매가 필요하다 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결혼집회에서 들림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호적으로 함께 전진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목적은 신성한 생명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됨으로써 성취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분의 백성 안으로 일해 넣어질 때, 신진대사적인 반응이 그들 안에서 일어나, 그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과 똑같이 되게 한다 ― 요 3:15, 요일 5:11-12, 고후 3:18, 롬 8:29.

3.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그분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일해 넣으심으로 그들의 생명과 본성과 모든 것이 되게 하시어, 그들을 하나님으로 적셔지게 하는 것이다 ― 엡 3:17.

C.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단체적인 한 사람을 얻는 것이다 ― 창 1:26-27.

D.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고 거룩한 부름으로 부르셨다 ― 딤후 1:9.

우리가 주님을 믿었을 때 우리가 반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복음에 반응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을 때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몰랐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의 그분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받기 전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지 않았다.

이제 딤후 1:9에서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내가 언급해야 하는 다른 항목이 있다. 그분으로부터 떠나간 사람들에 대해서 딤후 3장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의 사역으로부터 떠나간 사람들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나의 가르침을 긴밀히 따랐다고 하였다. 또한 긴밀히 따른 다른 몇 가지를 언급하였다. 바울은 ‘나의 목적’이라는 말을 언급하였다. "디모데야 너는 나의 목적을 긴밀하게 따랐다."

 1장 9절에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이 바울의 목적이 된 것이다. 디모데가 바울의 목적을 따랐을 때 자신 앞서 가고 있던 사람의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의 목적을 따른 것이다.
에베소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아주 직접적인 말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여기에서 믿는이들에게 바울은 말하고 있다.
시간을 구속하십시오. 술 취하지 마십시오. 땅에 속한 것들의 누림에 취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의 일생동안 주님의 목적이 여러분의 목적이 되게 할 목적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셨다.

1.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구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이 아들의 생명을 얻고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이 됨으로, 이 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시게 하는 것이다 – 요일 5:11-12, 롬 8:29.

2. 구원은 우리가 무의미한 인생에서 구원받는 것을 포함한다 ― 전 1:2.

나는 30살 혹은 그 이하의 젊은이들에게 잠시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 여러분은 분명히 세상의 친구들이나 여러분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과 함께 학교에 가는 동창들을 생각해보라. 지금 무의미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장래의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이다.
남한은 아주 부유하다. 북한과 아주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누릴 것이다. 수많은 청년들이 이러한 무의미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지막 호흡을 할 때, 헛되고 헛되다 라고 말할 것이다. 나의 온 일생이 의미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주 좋은 결정을 내렸구나! 라고 말할 것이다. 젊은 한국인들, 모든 한국인들이 무의미한 인생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들은 모르고 있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해도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능력 있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내 딸이 아내 태중에 있었을 때 내가 기도하였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 자녀를 위해 기도하였을 뿐 아니라, 인생의 이른 시기에 이 세상의 헛됨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딸이 16세에 교회 집회에서 일어났다. 내 딸이 말하였다. 아빠, 나는 세상의 공허함을 보기 시작하였어요.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아플 뿐 아니라 남한 땅의 젊은이들을 향하여서도 마음이 아파야 한다. 그들은 최신의 스마트폰이 있다. 삼성에서 일하고 있다. 아이패드, 최신의 컴퓨터 게임을 가지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남한 땅의 젊은이들이 북한의 사람들보다 더 심각하다.

우리가 38선을 넘어서 왕국복음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다. "주님, 남한 땅의 젊은이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무의미한 인생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a.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를 의미 없는 인생으로부터 구원하여 우주의 의미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 계 4:11.

b. 하나님은 위대한 의미와 목적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타락했고 인생의 의미는 상실되었다.

c. 하나님은 그분의 구원을 통해 우리를 구출하시고 우리의 본래의 목적, 곧 우주의 의미로 되돌아가게 하신다 ― 롬 8:28, 딤후 1:9.

돈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서 회복된 교회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필요가 있다.
회복된 교회의 본성을 보자.

Ⅱ.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의 표징으로서, 회복된 교회를 예시한다 ― 계 3:7.

A.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언적으로 형제 사랑의 교회, 곧 합당한 교회생활을 묘사한다 ― 계 3:7.

B.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에서 나와서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압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거합니다.” ― 요일 3:14.

회복된 교회 안에서 우리는 다 똑같다. 우리는 다 형제들이다. 남자 형제, 여자 형제들이 있을 뿐 우리는 다 형제들이다.
여기에 성직자 평신도는 없다. 우리는 모든 형제들을 향하여 같은 사랑을 가진다.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교육관 1층으로 내 아내와 내가 걸어 들어갔다.
자매님들 몇 분이 우리를 보고, 아주 흥분하셨다. 아마 기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분들이다. 그러나 제 마음 안에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다만 형제입니다. 나는 다만 란 형제일 뿐입니다. 나는 캥가스 왕이 아닙니다. 나는 황제 란도 아닙니다. 나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그는 물론 완전히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궁극적인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형제 나 요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매님들 다음에 저를 볼 때, 가능하시다면 진정하시기 바란다. 나는 다만 여러분의 형제인 란이다. 여러분은 또한 나의 자매들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높이는 분은 영광스럽게 되신 놀라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1.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이라는 근원, 본질, 요소, 범위에서 벗어나 생명이라는 근원, 본질, 요소, 범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 ― 요 3:3, 5-6, 5:24.

2. 형제들을 향한 사랑(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죽음에서 나와서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강한 증거이다 ― 요일 3:14.

a. 주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형제들을 향한 사랑은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증거이다.

여기의 어떤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다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생명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여러분이 생명으로 충만해진다면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이상하게 빗고 다닐 수도 있고, 심지어 머리가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머리가 파란 색으로 물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형제를 사랑하겠는가? 당신은 한국 사람이니까 검은색으로 염색하라고 말하겠는가? 그들이 누구이든지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모든 믿는 이들을 사랑한다.

b. 믿음을 갖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요 3:15).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인 영원한 생명에 의해 사는 것이다 ― 요일 5:13, 4:7.

3.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 요일 3:16.

a. 형제들을 위한 사랑은 형제들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자원하여 제쳐 놓는 것이다 ― 갈 5:13.

b.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형제들을 위해 우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어머니라면 모두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타고난 영역의 일이겠지만 원칙은 동일하다.
자녀를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후로 매일 여러분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13명의 자녀가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4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주 가난하게 자라셨다. 손가락을 다쳐도 치료할 길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까지만 하고 더 이상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직업학교에 가서 공장에 가서 일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12 형제자매가 있다. 17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학생으로서 굉장히 뛰어나셨다. 그런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좋은 대학교에 좋은 장학금을 받는 기회가 있었으나 갈 수가 없었다. 먼 지방에 가서 아주 천한 일을 하였다. 그래서 대공황 기간에 두 분이 만나 결혼하였다. 출산한 곳에서 어머니가 처음으로 들은 말이 나찌가 폴란드 바르샤바를 점령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이 결코 가져보지 않았던 기회를 자녀는 갖기를 원하셨다. 어머니가 줄 수 없던 교육의 기회를 어머니는 주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태어난 이후로 대학교 학비를 준비하기 위해 동전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가장 높은 사랑이 우리를 적신다.

사랑이라는 속성 안에서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섬기기 위해서 자동적으로 우리의 혼 생명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주님이 나와 여러분을 덮기 바란다. 봉사하는 형제들이 온 땅을 다니면서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남한 땅에서 살아내어지기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국인의 기질을 삼키기를 바란다. 더 이상 야심이 없다. 더 이상 경쟁이 없다. 동역자들을 향한 반역이 더 이상 없다. 사랑이 더욱 더 많이 흘러야 한다.

C. 빌라델비아 교회의 두드러진 한 가지 특징은 그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다 ― 계 3:8.

우리는 성경을 지킨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한다. 렘 15:16을 좋아한다. 말씀을 찾고, 말씀을 먹었다. 당신의 말씀이 내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1. 역사에 따르면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빌라델비아 교회만큼 주님의 말씀을 엄격히 지키지 않았다.

2. 회복된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는 전통을 주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한다 ― 비교 마 15:6하.

D.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 ― 계 3:8.

주님은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고 하셨다. 네가 가진 것으로 다만 최선을 다하라고 하신다. 기독교의 한 가지 특징은 능력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복된 교회 안에서 우리는 능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능력이 적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많은 사랑이 있다.

1.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강하고 능력 있으며 유력한 교회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2.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강함이 아니라, 우리의 적은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기는 이가 누구인가에 관한 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기는 이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여러분 대부분에게 주님은 한 달란트를 주셨다. 주님은 다만 그 달란트를 사용하여 한 달란트만 더 벌기를 바라신다. 10달란트가 아니다. 여러분에게는 적은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평안을 가지라.
다만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

E.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1.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표현이고, 주님의 이름은 주님 자신이다 ― 골 3:16-17, 마 18:20.

우리는 결코, 앞으로도 위트니스 리 이름을 사용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우리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배웠는가를 물으신다면, 나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에게서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은, 다른 이름을 결코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교파가 아니다. 우리는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 교파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앞장서서 아무것도 아닌 분들이 되었다. 그들은 주님을 높였다. 주님만이 높여 지셨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서 배웠는가는 알아야 한다.

2. 회복된 교회는 완전히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의 다른 모든 이름을 버렸다

남한 땅의 많은 수의 장로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중에 인도자 중의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자기들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주님의 회복이 조금씩 정통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그를 그냥 두면 된다. 모든 장로교인들이여, 여러분은 정통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왜 여러분은 칼빈주의라고 말하고, 왜 웨슬리를, 왜 다비를 따르는 이들이라고 말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높인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이름들을 버렸다.

F. 모든 이단과 전통에서 순수한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른 모든 이름을 버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회복된 교회의 가장 고무적인 증거이다 ― 계 3:8.

우리에게는 적은 능력이 있으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한다. 이것이 회복된 교회이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회복된 교회 안에 있기를 바란다. 아멘!(카톡방에서 받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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